창 6:1-12, 통제받음의 영성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도덕 기준을 따르기는 것 보다 개인의 권리가 우선되는 사회이다 보니, 개인(소수)의 특정한 상황(경험, 성향, 비록 그것이 일반 관습적인 사회와 어긋나는 것일지라도)도 존중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남녀간의 결혼과 성적인 문제(폴리아모리-다자간 연애 등)에 이런 경향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 이런 현실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은 그동안 소외되었던 이들이 권리를 주장하거나 누릴 수 있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면은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보편타당한 도덕과 관습이 무시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특히 이런 현상에 대해 우려하며 반대하는 기독교에 대해 반감이 큰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도 간음한 여인등 사회적인 소수 약자를 품으신 분인데, 교회가 이런 비소수 성향의 집단을 정죄할 수 있나고 반문하며 비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
성경은 우선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관리하며 살 것과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를 부부로 맺어 주는 사회적인 관습을 만들어 주셨고, 또 그렇게 살기를 기대 하신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또 다른 이야기는 세상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창조주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력이 있었고, 그 세력의 충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깨뜨리는 일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아담과 하와, 동생을 죽인 가인, 두 아내를 맞은 라멕, 그리고 오늘 본문이 전해지는 기이한 이야기(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은 이야기)까지, 세상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세상과 인간 사회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성향과 기호를 따라 마음대로 살아가려는 개인과 집단들이 존재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존재들과 하나님까지는 아니라도 신적인 존재를 인정하면서 사회의 기본적인 관습을 지키려는 이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지만,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이들 가운데서도 성경과 하나님을 오해하여 마음과 기호를 따라 사는 것이 권리인양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성향과 기호를 따라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이들이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롬 1:18-32)
우리는 인권이라는 사람의 권리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절대 신권을 부정하는 시대를 살고 있기에, 그들의 주장은 점점 힘을 얻을 것이며 앞으로 보편적이고 사회 집단적인 도덕을 무시하는 형태들이 계속 등장할 것으로 봅니다. 가정과 사회를 기본으로 하는 보편적인 사회의 룰을 존중하는 것에서 개인주의 성향을 강화해주는 사회로의 변화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사회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오늘날 만의 특별한 문제는 아닙니다. 역사는 언제나 이런 삶을 패턴을 반복해 왔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너무 좋아서 문제를 만든 시대도 있었고, 너무 없어서 문제를 만든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을 존중하고 따르는 이들과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기호와 성향을 따르는 이들이 반목하며 존재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역사는 그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보편적이고 관습적인 도덕을 준수하는 이들이 소수가 되어버린 세상, 즉 “자기의 좋아하는 기호를 따라 마음대로 행동하는 이들”이 다수가 되어 버린 세상이 어떤 결말을 맞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를 믿지 않는 이들이 보면 허무맹랑한 전설같이 보이겠지만, 역사에 전해져 오는 모든 이야기는 원인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 이야기는 홍수를 겪었던 노아와 그 후손들의 기억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기에 더욱 진실합니다.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 세상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자기가 선택하는 것을 따라)
2) 창조주를 대적하며 죄의 짓는 존재는 필연코 행동에 대한 댓가를 치릅니다.
- 쓸어 버리고, 멸하고, 멸절하고, 죽을 것이다.
3) 하나님의 관심은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며 따르는 노아에게 있습니다.
-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지,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의 삶의 패턴은 하나님의 근심과 결정을 불러 왔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것이었고, 자신들의 기호와 성향을 따라 마음대로 사는 죄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한 삶을 산 결과는 하나님 앞에서 멸절받을 존재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누구든지 자기 기호와 성향을 따라 마음대로 살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그 삶의 결말 또한 스스로 감당할 몫이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섬뜩할 정도로 매새운 단어들입니다. 새겨들어야 할 것들입니다.
예수님도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용서는 하셨지만, 그 여인이 행한 행동은 인정하지 않으셨고, 그녀가 행한 간음은 분명한 죄라고 하셨습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 있고, 사회 공동체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될 창 5-6장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존재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초점은 하나님을 마음 다해 존중하고 따르는 선한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 사람이 노아이고, 그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여신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한 사람을 통해 구원의 방주를 짓게 하셨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초점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노아 시대의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이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의 법을 따르려고 노력하면서 예배할 줄 아는 존재들에게 관심이 있고, 이들을 통하여 이 세상이 존속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며 따르는 이들인 교회는 개인의 기호와 성향을 따라 마음대로 살려고 소리치는 자들 한 가운데에서 그 삶을 심판하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선언하는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세상이 어떠할지라도 하나님을 택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외치는 이 시대의 노아들이 존재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노아를 특징 짓는 단어는 의인(righteous), 비난받지 않는(blameless), 하나님과 동행(walked with God)입니다. 의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구원의 칭호이며, 비난받지 않음은 사회속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성경을 따라 기도하고 예배하는 가장 심플하나 최고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가 추구해야할 삶입니다. 기호와 성향을 따라 마음대로 사는 대신에,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그 법에 통제되는 삶을 사는 것이 인간다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존재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롬 12:1-2절이 결론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과 더불어 거룩한 삶(성경, 기도, 예배, 복음)에 늘 접촉하며 살아라.
샬롬!!